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픈릴 테이프 (문단 편집) === 중기 2: 미국의 개량 작업 === 독일이 패전한 뒤 각지의 방송국을 접수한 [[연합군]] 당국에서는 마그네토폰과 자기 테이프를 압류해 본국으로 보냈고, 특히 미국에서는 [[https://www.ampex.com/|암펙스]]가 재빨리 이 마그네토폰의 개량형 테이프와 녹음기를 1946년 봄부터 시판하기 시작했다. 이 장비에 처음 주목한 유명인이 [[빙 크로스비]]였는데[* 참고로 빙 크로스비는 [[얼리 어댑터]]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다. 방송용 비디오 테이프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.], 크로스비는 당시 라디오 쇼를 진행하면서 가뜩이나 넓은 미국 땅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 생기는 [[시차]] 때문에 양쪽의 주 시청 시간대를 맞추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. 크로스비는 시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[[컬럼비아 레코드]](Columbia Records)에서 제작한 대형 SP인 브로드캐스트 트랜스크립션 디스크로 자신의 쇼를 녹음한 뒤 재방송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, 이것도 잡음이 심하고 녹음 가능 시간대가 한정되어 있다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. 하지만 암펙스의 테이프 녹음기는 녹음/재생 가능 시간이 훨씬 길었고 편집 작업이나 더빙도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. 결국 크로스비는 1947년에 사비를 털어 이 암펙스제 녹음기를 구입한 뒤 방송 제작에 사용하기 시작했고, 자연스럽게 미국의 여타 라디오 방송국들도 테이프 녹음기를 도입했다. 더불어 자기 테이프의 미국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[[3M]]과 여타 제작사들이 테이프의 대량 생산 체계를 재빨리 갖추고 [[쇼미더머니|마구 뽑아내기 시작했다.]] 다만 1940년대 후반까지는 이렇다 할 관련 규정이 정비되지 않아서 회사마다 제각각의 테이프와 녹음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고, 정확한 규격이 마련된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다. 어쨌든 이렇게 해서 방송국 뿐 아니라 음반사들도 음반 제작 때 번거롭고 [[삑사리]] 수정도 안되는 원판 마스터 제작 방식을 버리고 테이프 녹음을 사용하기 시작했고, 가장 보수적이었던 [[EMI]] 같은 음반사도 1950년대 초반에 [[LP]]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. 특히 LP의 발명과 거의 비슷하게 들어온 테이프 녹음은 장시간이 필요한 [[오페라]]나 [[교향곡]] 같은 대곡 등의 녹음에 매우 요긴하게 쓰였고, 방송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도 훨씬 늘어나게 되면서 수요가 급증했다. 심지어 몇몇 음반사에서는 나치 독일의 제국 방송국들이 음악 프로그램용으로 녹음한 이런저런 테이프를 무단으로 복제해 음반으로 내놓는 바람에 [[저작권]] 문제로 난리가 나기도 했다. 또 이 매체의 보급 덕에 [[일렉트로니카|전자음악]]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. 프랑스 작곡가이자 음향 기술자 피에르 셰페르(Pierre Schaeffer, 1942~1990)는 테이프로 녹음한 여러 잡다한 소리를 더빙하고 변조시킨 [[구체 음악]]을 창안했는데, 이는 음악이 기존의 성악/기악 같은 연주 형태에 의존하지 않고 리듬과 박자, 빠르기, 음정 등에도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였다. 셰페르 이후 에드가르 바레즈(Edgar Varèse, 1883~1965), [[피에르 불레즈]], [[칼하인츠 슈톡하우젠]] 등의 신진 작곡가들이 이 흐름에 영향을 받아 전자음악 혹은 전자음악과 생음악을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고, 이후에도 현대음악계의 한 축을 이루면서 이어지고 있다. 당연하겠지만 팝 음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. 월 오브 사운드나 [[비치 보이스]], [[비틀즈]], [[크라프트베르크]] 같은 팝 음악계의 음향 실험 역시 오픈릴 테이프랑 다중 녹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